양반가에서의 노비 역할 - 전라도 부안의 우반동김씨가의 사례를 중심으로
기관명 | NDS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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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명 | 지방사와 지방문화 = Journal of local history and culture |
ISSN | 1229-9286, |
ISBN |
저자(한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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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영문) | |
소속기관 | |
소속기관(영문) | |
출판인 | |
간행물 번호 | |
발행연도 | 2012-01-01 |
초록 | nbsp; nbsp;필자는 본고에서 전라도 부안의 우반동에 世居했던 扶安金氏家에서 노비들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이 부안김씨의 中興祖로 알려진 김홍원은 농장을 관리하던 사내종 우세와 집안일을 도맡아서 한 군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중 군석은 이 가문의 戶奴였는데 그는 집안의 모든 일을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상전을 대신하여 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세금도 납부하는 등 執事奴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상전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려고 노력하였다. nbsp; nbsp;김홍원과 그의 조상들은 전라도 용담현과 임실현의 섬진강과 금강 상류 근처에서 물을 막아 논을 개간하고 부안현의 주을래리의 바다에 漁場을 조성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은 모두 협동심이 강하고 숙련이 잘 된 사내종들이 있어야만 가능하였다. 부안김씨가 경제적으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내종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또 김홍원은 1597년에 일본군이 조선을 再侵하자 그의 家奴 중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한 사내종들을 데리고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사내종들은 비록 군사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개간 등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조직되고 잘 훈련되어 있었는데 전쟁터에 나가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봉에 서서 싸웠기 때문에 곳곳에서 커다란 戰功을 세울 수 있었다. 김홍원은 그들의 승리 덕택에 하루아침에 정3품 通政大夫가 되고 그 이후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다. 물론 김홍원이 이와 같이 여러 관직을 역임하게 된 것은 그의 능력과 노력 등이 바탕이 되었지만, 의병 활동으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nbsp; nbsp;부안김씨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노비 덕택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제적 또는 정치적으로 부상할 수 있었지만, 그들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했다. 많은 노비를 소유했던 부안김씨가 戊申亂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또 이 집안 노비 출신이 반란군을 지휘한다는 소문 때문에 김홍원의 후손들은 사형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nbsp; nbsp;그러나 대체적으로 우반동의 부안김씨는 자신 소유의 노비들을 잘 관리하였다. 손재주 좋은 노비들에게 각종 생필품 등을 제작하도록 하고 어업에 종사하는 외거노비들에게는 신공 대신 물고기를 바치도록 해서 家內에서 사용하거나 혹은 京鄕의 친인척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또 부안김씨는 부안과 그 인근 고을에 있던 경화사족의 농장에서 생산된 곡식이나 생필품 등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선박을 통해 서울과 경기 등지로 운송해주는 등 갖은 편의를 제공하며 경화사족과 교류하였는데 바로 이 집안에 사공노릇을 하는 사내종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부안김씨가 해안가의 궁벽한 마을에 세거하고 있으면서도 양반으로서의 가세와 지체 및 명성을 유지하고 살 수 있었던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노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원문URL | http://click.ndsl.kr/servlet/OpenAPIDetailView?keyValue=03553784&target=NART&cn=NART69881719 |
첨부파일 |
과학기술표준분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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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T 기술분류 | |
DDC 분류 | |
주제어 (키워드) | 노비,솔거노비,외거노비,정유재란,부안김씨,의병,호노,slave,household slave,out-resident slave,Japanese invasions,Buan Kim lineage,guerrilla force,chief sla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