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
'혁명적 낭만주의'의 구호는 신민가 운동을 배경으로 제기된 '양결합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부활하였다. 그런데, 혁명적 낭만주의의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양결합론이 신민가 운동을 배경으로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제 살펴보겠거니와, 신민가 운동은 중국화된 혁명적 낭만주의의 모든 요소와 특성들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때문에 그것은 毛澤東의 혁명적 낭만주의를 고찰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선택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모델이기도 하다. 혁명적 낭만주의를 되살려내기 위해 구상되었던 '양결합'론의 이론적 공허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배경에 신민가 운동이라는 역사적 실체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민가 운동의 처음 시작이 정확히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드물다. 1957년 가을 이후 농업합작화 운동과 이를 위한 대규모 수리 건설 사업이 전개되었는데, 이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전국 각지에서 민가 형식의 혁명가요들이 창작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현상에 일군의 지식인과 중공 지도부가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 본격적인 신민가 운동의 출발을 위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러한 민간 창작 운동의 시발이 당 내부의 毛澤東 그룹에 의해 은밀하게 기획되고 장려되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농업합작화의 열기에 고무된 농민대중들이 민요 가락에 혁명적 내용을 담은 가사들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시작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신민가 운동의 실질적 시작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그것이 본격적인 정치적ㆍ문학적 운동으로 발전하도록 불을 당긴 사람이 毛澤東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농민들의 시가 창작에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이름을 새롭게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더해진 폭발적 대중 운동으로 만들어냈다. 毛澤東은 1958년 3월 成都에서 개최된 1차 중앙공작회의(일명 '成都會議') 중에 행해진 연설 가운데 3월 22일의 연설 끝머리에서 중국 신시의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중국의 신시는 “형식은 민가이며, 내용은 마땅히 현실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적 통일이어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는데, 이것이 '양결합' 이론 제창과 본격적인 신민가 운동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이후 신민가 운동은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확대되어 가는데, 이러한 신민가 운동의 열기를 徐遲는 “어디나 시의 바다가 되었다. 중국은 시의 나라가 되었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신민가 운동이 번져 가던 동안 중국의 “거의 모든 현에서, 현 위원회 서기에서 대중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시를 썼다. 전부가 민가전람회를 열었다. 어디나 시 경연대회를 가졌고, 모든 성은 무선방송을 통해 시 경연대회를 가졌다. ……. 길거리에서 시를 쓰고, 돌비석에 시를 새기고, 찻간ㆍ공사장ㆍ고로에도 시를 붙였다. 시의 전단이 전국에 날아다녔다”. 1958년 한 해 동안 사천성(四川省) 하나에서 출판된 민가집의 수가 3천 7백여 종에 이르렀으며, 각 성(省)마다 대략 1,000만 수 내외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시가가 수집되었다는 통계가 있는 것을 보면 이 당시 신민가 운동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다. 이 밖에 운동의 성과가 우수한 마을에는 '시현(詩縣)', '시향(詩鄕)', '시촌(詩村)'과 같은 이름이 붙여져 모범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