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
경주 금장리 밭 유구는 新羅王京인 경주에서 최초로 확인된 농경생산유구라는 점에서 이제까지 실체가 확인되고 있지 않던 신라사회의 早田農業技術과 식생활 문화, 농업생산력의 문제 등 신리농업사 및 사회경제사 연구에 좋은 기초자료가 된다. 하천퇴적지형에 위치한 금장리 유적은 홍수 범람에 의한 廢田으로 추정되며, 1~4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14개의 개별 단위 밭 유구의 조성연대는 Ⅰ~Ⅲ기로 분류된다. 밭터의 상한은 5세기 중ㆍ후반이며, 하한은 7세기중ㆍ후반~8세기 전ㆍ중반으로 추정된다. 作畦 형태는 고랑과 두둑이 병렬적으로 조성된 이랑 형태가 가장 일반적인 形으로 확인되며, 두둑과 고량의 너비 차이에 따라 畦立法과 盛畦法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고랑과 두둑의 너비 차이는 작물의 재배종과 재배방식에 따라 작휴 방식의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밭 구획 시설로는 溝와 둑이 있으며, 작물의 종류를 구분하기 위한 단위, 경작자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단위 등의 의미를 가진다. 경주지역 고분군 출토 철제농구의 검토를 통한 당시 농경 작업에 사용된 철제농구는 주로 人力耕具가 확인되었으며, 農具의 조합상 및 灌漑시설로 판단할 때 경작 주체자에 의해 경작지가 지속적으로 관리ㆍ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작지에서 수습된 탄화곡류의 분석을 통해 新羅時代 旱田에서 도陸稻가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시비법과 토지이용방식 문제도 함께 검토하였다. 끝으로 위의 검토 결과, 경주 금장리 新羅時代 旱田遺蹟은 6세기를 전ㆍ후한 신라사회의 중요 변동 요소 가운데 왕경 주변 저습지와 하천 주변 미개지 개발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경지 확보 차원으로 개발된 경작지이며, 5세기~8세기 이후까지 경작이 지속된 왕경과 분리된 식량 생산지역의 성격을 가진다. 따라서 금장리 유적이 위치한 곡간평야지대 일대는 문헌기록에서 보이는 良田이었을가능성이 있다. |